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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Coggle Diagram
프랑스 혁명
역사 흐름
국민 의회
테니스코트 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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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일부 성직자와 귀족 대표 (삼부회의 1200명 대표중 제 3신분은 약 600명 나머지 두 신분이 각각 300명 정도였다) 일부가 국민의회에 가담함. 그래서 루이 16세도 결국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인원별 투표로 바꿈. 이후 국민제헌의회로 이름 바꿈
의의
단순히 기득권층과 핍박받는 피지배층의 대립하는 양상이 될 줄 알았는데 기득권 층 일부가 가담한게 놀랐다.(진심으로 놀람). 실낙원의 내용 자체가 단순히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깨고 그 속에 숨겨진 갈등의 원인을 해결해 나가는 참회자 릴라의 이야기 인데, 나 조차도 처음의 릴라와 똑같이 이걸 단순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으로 보고 있었던게 조금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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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원인
국민제헌의회가 생기고 왕, 귀족, 성직자 놈들이 얘네한테 해코지 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돔. 그당시 평민 계층에게 얘네는 살아있는 신이었음. 그런데 루이 16세가 용병부대를 파리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찌라시가 돔. 제 3계층 : 이 씨발럼들이? 그래 대가리 한번 깨보자 해서 무기 왕창있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여기가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음
결과
시민 지지로 봉건제 폐지, 조세 평등, 신분 상관없는 공직 기회 평등 등을 법 제정,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왕권 신수설 대항)
의의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수지타산을 따질 때는 별로 중요한 건물이 아니였음(당시 풀어준 수감자도 잡법 7명이 다임). 그냥 왕권의 상징인 건물이여서 턴거임. 그러나 이 상징과 집단 기억이 혁명에 미친 영향. 그리고 프랑스인이 이 날 7월 14일을 아직도 국경일로 정해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은 그 상징의 중요성을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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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 사건 1791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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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놈의 처벌을 안한다는 소식에 반발이 컷음. 7월 17일, 자코뱅주의자들과 코르들리에 클럽이 주축이 되어 파리 마르스 광장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고, 국민의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을 보내 이를 무력 진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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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9월 대학살
1792년 8월 9일, 프랑스 시민의 대표를 자처한 지구의원들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파리 코뮌(자치시회)을 수립하며 파리 전 지구의 시민 봉기를 호소했다. 이에 호응한 파리 시민들은 8월 10일 전면 궐기하여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다. 결국 의회는 루이 16세 일가를 코뮌 측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후 파리는 1달여간 정부, 의회, 코뮌의 세 세력이 충돌하여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9월에는 오스트리아의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주의자들이 봉기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혁명 용의자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제1 공화국, 국민공회 수립 1792년 9월 20일
9월 20일,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새로이 국민공회가 수립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 수립을 선언한다(제1공화정). 입법의회에서는 좌파에 해당되었던 지롱드파가 국민공회에서는 우파로 돌아섰고, 좌파에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하는 '산악파'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런 가운데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지롱드파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한 반면, 산악파는 "확고한 혁명의 완수와 공화국 체제의 완비를 위해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산악파는 파리의 '자코뱅주의자'들과 과격한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벌어진 투표 끝에 승리하게 된다.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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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을 결여한 공포는 치명적이고, 공포를 결여한 미덕은 무기력합니다. 공포는 단호하고 신속하고 무정한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공포는 미덕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혁명정부는 폭군에 반하는 자유의 전제정입니다 - 공포정치를 주장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지롱드 파 vs 자코뱅 파
씨발 서로 존나 싸움 지롱드는 지들이 정치적으로 발리니까 12인 위원회 설치해 코뮌 압박. 자코뱅 파도 공안위원회를 통해 자코뱅이 지롱드파를 몰아내려함.
1793년 5월 31일, 시민들의 봉기 지롱드가 자꾸 자코뱅 억까해서 감옥에 넣으니까 봉기. 결국 역풍 처맞고 29명 감옥가서 지롱드파 몰락
1793년 7월 13일, 장폴 마라의 암살
그러던 중 1793년 7월 13일, 산악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과격 혁명가였던 마라가 지롱드파 지지자였던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터졌다. 이를 다룬 유명한 그림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이렇게 되자 로베스피에르는 "방종한 자유의 폐기"를 선언하며 자신은 공안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공포정치가 실시된다.
공포정치
자코뱅당 좌파의 자크 르네 에베르는 반혁명 용의자를 즉각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로베스피에르가 이에 동조하면서 본격적인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재판소를 강화하고 통제경제를 시행하여 국가를 비상체제로 전환한다. 혁명재판소에서는 반혁명의 죄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내게 된다. 지방으로 숨어든 지롱드파의 지도자들과 지롱드파의 지주였던 롤랑 부인이 처형되었다. 이때 그녀는 처형 직전 그 유명한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무슨 죄악이 저질러졌느냐?"를 외쳤다.
아울러 이때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리고 공포정치는 약 1년여간 무려 1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중에는 반혁명 혐의자는 물론이고 무고했으나 이들에게 엮인 자들도 분명 있었다.
산악파의 내에서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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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3월, 4월에 각각 에베르와 당통이 처형됨
이 시기에 유명해진 인물이 혁명의 대천사 또는 죽음의 천사장, 또는 '단두대의 천사'라고도 불렸던 생쥐스트. '빵은 인민의 권리'라고 말하던 사람이 '자유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혁명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극단적 흑백논리까지 나가서 프랑스 혁명의 급진화를 상징하게 된다.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
공포정치 ㄹㅇ 뇌절 싸서 민심 다잃음.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쿠통과 그들을 지지하던 19명은 다음날인 7월 28일(테르미도르 10일)에 재판 없이 바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둘 다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았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벌을 받았으니 아이러니하다. 그것도 이들을 보낸 콩코르드 광장에서. 죽기 전 다음 차례는 로베스피에르가 될 거라던 조르주 당통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의의
거기다 역사적으로 큰 혁명이 일어난 후에 혁명의 열기가 과열되고 개혁의 피로가 누적되는 반면 혁명의 성과나 사회적 변화는 금방 나타나지 않아 이에 민중들이 혁명에 실망하며 그 여파로 이런 반동적 반혁명 사건이 있기 마련인데 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그런 아주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에 자주 언급된다. 혁명의 반동사건의 예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프랑스 혁명이 끝났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뒤에 집권한 총재정부는 혁명의 방향성을 틀어버렸고, 이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아예 혁명을 끝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등장
대충 3분의 2법 재정후 반혁명세력이랑 왕당파가 뇌절 싸는거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 또는 포도달 13일의 폭동) 나폴레옹이 포도탄으로 다 조져버림 1795년 10월 5일
795년 헌법에 의해 성립된 총재정부는 자신들의 구상대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선거권은 지극히 일부에게만 부여되었고, 피선거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총재정부의 행정부는 의회가 선출한 5명의 총재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였다. 하지만 철저한 삼권분립으로 인해 행정부와 입법부가 지속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철저한 중도정치의 경우 양 극단의 세력 즉 왕당파와 급진파에 의해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대외전쟁으로 인해 재정상황은 나아지지 못하고 악화일로를 걷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총재정부는 이 시기에 나폴레옹의 의견을 적극 채택하여 그로 하여금 1796년 3월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게 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악화된 교황청과의 관계를 이탈리아 원정으로 회복하는 등의 업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러던 상황에서 테르미도르파 총재정부는 반대파 제거를 위해 쿠데타를 지속적으로 일으켰다. 첫 번째 쿠데타는 1797년 9월에 있었다. 이는 1797년 의회 선거에서 과반에 가까운 의석수를 차지하며 대승을 거둔 클리시파(온건 왕당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쿠데타는 당시 프랑스 군대의 실권자 나폴레옹의 방조 속에 성공을 거두고 말았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1798년 4월 네오 자코뱅파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자 이들을 탄압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쿠데타의 연속은 군부의 행정부에 대한 영향력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총재정부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프랑스 군대의 실권을 쥔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겠다는 그의 의지와 그의 인기에 위협을 느낀 총재정부의 입장이 더해지며 1798년 7월에 이집트 원정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유럽 내에서 반혁명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전선은 확대되었고, 당시 프랑스 군대는 나폴레옹에게만 의존했기 때문에 그가 이집트로 빠져 있는 동안 혁명전쟁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798년 8월에 프랑스군이 나일 해전에서 대패하며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갇히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유럽에 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정복하려다가 오히려 여러 동맹국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99년 4월 총재로 정계에 복귀한 시에예스는 총재정부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되었고, 6월 18일에 자신과 반대되는 총재의 취임을 막는 쿠데타를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국내외적인 상황은 총재정부의 영향력을 급속도로 악화시켰고, 의회에는 과격파가 준동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에 가깝게 되었다. 이는 시에예스가 총재정부를 무너뜨리는 계획에 더욱 더 열망을 갖게 되는 계기로 발전했다.
그러던 중 9월에 나폴레옹이 정부의 명령 없이 프랑스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를 열렬히 환영한 민중을 본 시에예스는 자신의 쿠데타 계획에 나폴레옹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1799년 11월 9일에 쿠데타를 진행하게 된다. 특히 500인 회의의 의장이 나폴레옹의 동생 뤼시앵이었다는 점이 행운이었다. 나폴레옹은 생각 외의 반발에 당황했지만, 동생의 지지 덕분에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다. 총재정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고, 3명의 집정이 이끄는 새로운 집정정부가 수립된다. 그리고 제1집정으로 나폴레옹이 오르게 되면서 혁명은 완전히 막을 내린다.
총재 정부
테르미도르 파의 '총재정부' 구상
이렇게 나폴레옹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 '국민공회'의 부르주아들은 다른 형태의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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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점
시민의 자유를 위해 들고일어나 생긴 프랑스 대혁명이 결국 자신들을 이끌어줄 또다른 독재자 나폴레옹의 탄생으로 이어진게 정말 아이러니 하다. 혁명의 피로에 지친 민중이 다시 독재자를 원하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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