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계속해서 진행된다면, 그 위협은 계속해서 도사릴 것이고, 아무리 저자가 말하는 마지막 보루 , 민주주의의 문지기 , 특별한 지위에 있는 정치가들의 문지기 역할에도 한계가 온다. 위험성 99%를 방지하는 것이 청지기가 될 수 있어도, 위험성 100%의 상황, 전에 언급한 민주주의가 거리두기를 당하는 상황에 쳐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될 ㄱㅓㅅ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민주주의를 빼앗았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보상없이 그들의 자리를 삭감하는 방식으로만 나아 갔음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는 정당이 청지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청지기 또한 막을 수 없는 위험은 분명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가서야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소수의 엘리트들이 찾는다면, 국민들의 민주주의는 등을 돌릴 것이다. (몽테스키외 법의정신)
나는 국민과 정치가들의 영역을 나누고, 정치가들의 영역이 국민의 영역에 상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찬 저자의 주장과 해결에 대하여 전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정치인 또한 국민이며, 정치인이기 전에 국민이다.
민주주의의 위협에 대한 해소를 정치가들의 영역에서 찾는 방식의 해결은 분멍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정치가 이전의 국민이다. 그리고 극단주의적 선동가 또한 이전에 국민이었다. 이런 점을 볼때, 선동가들은 정치적영역에 갑자기 ㄴㅏ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ㅈㅏ꾸만, 타자들의 자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동가가 될 수 있으며, 그 선동가와 같은 피해를 가진, 소위 민주주의에 배신당한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성되며, 이들이 그 선동가를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민주주의라는 것을 정치적인 의미로서만 사용하면 안된다. 누구도 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상처받게 해서는 안되며, 만약 상처받더라도 치유해줄 수 있는 민주주의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극단적이ㄴ 선동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민주사회안에 있지만,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신당하는 사건들에 의해 점점 민주주의는 전복되어 갈 것이다.
즉, 민주주의의 전복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 해결 또한 국민에게 달려있다. 누군가의 자리를 없애는 방식보단, 서로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방식으로의 국민들을 만들억어는것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고, 또한, 나는 그러한 국민들을 기독교의 사상에 입각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